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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두 얼굴의 조선사

“군자의 얼굴을 한 야만의 500년”
2016.4.8 1판 3쇄

예송논쟁은 표면적으로 보면 왕가의 상례를 두고 벌어진 의례 논쟁이지만 실상은 정권의 향방을 다투는 목숨을 건 권력투쟁이었다. 상복 의례는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편리한 구실이자, 권력투쟁의 실상을 감추어 포장할 수 있는 세련된 정치도구였다. 적을 무자비하게 무너뜨리고도 근엄하게 예를 차릴 수 있는 위장된 무기였다.

외양은 왕을 정점으로 한 피라미드식 권력구조를 하고 있지만 권력행사의 실상은 양반관료가 왕을 내세워 지배질서를 강화해나가는 시스템, 그것이 조선왕조의 권력구조 양상이자 권력 작동의 본모습이었다.

조선 지배층은 노비에 대한 통제 또한 강화해나갔다. 세종 초인 1422년에 노비가 그 주인을 고소할 수 없다는 법을 제정했다. 반역이나 역모 회의 사안에 대해 노비가 주인을 고소하면 교수형에 처하도록 했다.

대동법을 추진한 지배층의 주된 의도는 한계에 이른 방납제의 폐단을 고쳐 지배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었지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혁신에는 미치지 못했다. ‘민생을 염려하는 사림’이라는 수식에 걸맞은 활동으로 대동법을 꼽으며 이를 은근히 치켜세우기도 하는데, 오히려 대동법 실시과정은 지배층의 기득권 지키기가 얼마나 견고한지를 말해주는 사례다.

제사, 신분제 사회의 가부장제 수호의례

위민과 애민이라는 한글 창제의 명분 이면에는 지식을 독점하고 신분질서를 유지하려는 통치 전략이 숨어 있었다. 한글 보급은 문자생활을 필요로 하는 피지배층의 요구에 대한 지배층의 적극적인 대응책이었다.

위계와 특권이 보장되는 나라로서의 조선은 그래서 지금도 그 속내를 거두지 않는다. 단상에서의 외침과 달리 그러한 조선을 속 깊이 품고 있는 양반과 사림 후예들의 통치 방식과 지배 전력도 여전히 힘을 잃지 않고 있다. 그 조선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 후예들은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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