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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괴물이 된 이십 대의 자화상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들이 실업에 허덕이는 이유가 다른 세대보다 더 게으르고, 덜 똑똑하고, 더 어설프고, 덜 활동적이어서다? 말도안되는 소리다.

자기계발서가 많이 팔리고 또 이를 읽고 감동받아 일상에서 자기계발을 실천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절망에 빠져 있는 끔찍한 이십대의 이야기는 비례적으로 늘어난다는 사실이다.

지금 그렇게 한가한 자기만족은 관심 밖이다. 이들에게 자기계발이란 ‘가시적인 성과를 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또 그렇게 하도록 강요한다.

그래서 공감이라는 것은 타인의 상황을 사회적 조건과의 관계 속에서 객관적으로 이해하게끔 하는 결정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직접 생생한 현실의 풍경을 보고 목소리를 들으면, 특수한 사례를 일반화하는 식의 잘못된 생각을 깰 수 있고 궁극적으로 더 발전된 사고를 할 수 있게 된다. 당연히 그 과정을 통해 개인은 유연해지게 마련이다.

대학의 ‘과잠’이 마치 그 개인의 현재 가치를 보여주는 소품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투 스트라이크를 맞은 상태로 인생을 시작하는가하면 어떤 사람들은 3루에서 태어난 주제에 자기가 3루타를 쳤다고 생각하며 산다. … 희망, 그건 개인에게 강요할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순을 해결함으로써 자연스레 생겨나도록 해야 한다.

과정의 공정성 속에는 이처럼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는 사회적 요인들이 촘촘히 얽혀 있다.

출발선과 과정에서 공정했다고 그 결과의 공정성이 저절로 완성되는게 아니다. 마지막 결과된 모습까지 공정해야 그게 공정한 사회인 것이다. 진정한 공정성은, 예컨데 출발과 과정에서 공정을 기했음에도 평범한 노동자가 하루 8시간 열심히 일하고도 3인가족이 최소한의 생활을 꾸려갈 수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면 그 모자란 만큼을 채워놓는 데 있다. 그래야 결과의 공정성도 이뤄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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